잔나비 소곡집 I 작업기

잔나비 소곡집 I 작업기

음향 엔지니어 시절, 잔나비의 ‘소곡집 I’ 앨범 작업에 참여했던 특별한 경험담. 보컬 녹음부터 튜닝까지, 밤새워가며 완성했던 앨범 제작 과정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제가 일하던 스튜디오에는 많은 단골 뮤지션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단골 뮤지션들 중 밴드 잔나비의 ‘소곡집 I’ 앨범 작업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주어진 기회

2020년 10월 그 스튜디오에서 일한 지 두 달 남짓 되었을 때 잔나비가 새로운 앨범을 준비한다며 찾아왔습니다. 그동안 정규 앨범들에서는 컨셉에 맞지 않아 내지 못했던 좋은 곡들을 소곡집으로 모아 발매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일하던 스튜디오는 연륜이 있는 뮤지션들이 주 고객이라 제가 평소에 자주 듣는 음악들을 작업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잔나비의 작업 소식은 굉장히 설레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직한지 얼마 되지않아 스튜디오의 정책과 매뉴얼들을 익혀가는 시기였기에 아직 녹음을 많이 할 때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객들 중에서도 VIP였던 잔나비의 녹음은 조금 더 연차가 있는 엔지니어가 녹음을 받게 될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강하게 키우기 위함이었을까 갑자기 저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보컬을 녹음 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전에 일하던 스튜디오와 바뀐 시스템에서 아직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때라 걱정도 많았지만, 기회가 주어졌기에 잘 해보겠다 답했습니다.

녹음 당일

보컬 녹음 부스

TV에서만 보던 잔나비의 보컬 최정훈님이 편한 츄리닝 복장으로 오셨고, 기타리스트 김도형님, 그리고 매니저님이 함께 오셨습니다. 날씨가 조금 추워지기 시작해 전기난로를 틀었었고, 특이하게 앉아서 신발을 벗고 노래하셔서 바닥에 담요를 깔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최정훈님이 노래를 그렇게 잘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녹음을 해보면서 노래를 너무 잘해 깜짝 놀랐었습니다. 무슨 발성 이런걸 떠나서 음악에 착 달라붙는 디테일과 느낌이 너무 좋았습니다.

이 날 녹음한 노래는 3번 트랙 ‘그 밤 그 밤’ 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 녹음이 제 커리어 중 가장 아쉬운 날이었습니다. 김도형님이 제 옆에서 보컬 디렉팅(보컬이 곡을 더 잘 녹음을 할 수 있게 실시간으로 조언)을 하셨는데 평소와 다르게 중간중간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실수를 여러 번 했었습니다. 이날 잠을 거의 못자고 와서 많이 피곤한 상태였는데 그래서 그랬던 건지 너무 아쉬웠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잔나비의 음악을 자주 듣긴 했지만 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뮤직 페스티벌을 몇 번 다녀오고 잔나비에 아주 제대로 빠져들어 요즘은 잔나비 음악만 듣고있습니다. (아 이 날 친분좀 쌓을걸..)

2024 서울 재즈 페스티벌

그래도 이 날 잔나비와 도시락 같이 먹은 사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저는 성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합격 목걸이

그렇게 녹음을 마무리했고, 총 5곡의 보컬, 악기 녹음을 여러 엔지니어들이 함께 마무리하여 이제 후 작업만 남았습니다. 후 작업 중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보컬 튠 작업, 즉 보컬 녹음본에서 음정, 박자, 끝음처리, 숨소리 등 노래를 최대한 완벽하게 수정하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도 사실 더 연차가 많은 엔지니어가 하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일단 한번 해봐라 식으로 또 기회가 주어졌고, 컨펌을 받기 위해 밤을 새가며 튠 작업을 했었습니다.

이때 작업한 곡은 2번 트랙 ‘한걸음’ 이라는 노래입니다. 정말 저를 갈아서 열정적으로 작업을 했던 결과일까, 잔나비 측에서 아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수정사항도 단 한 개 밖에 없었습니다.

가을밤에 든 생각

그렇게 잔나비 앨범의 첫 번째 튠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어느정도 실력을 인정 받은 저에게 타이틀 곡 ‘가을밤에 든 생각’의 튠 작업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자신감이 붙은 저는 또 밤을 새 가며 잔나비의 음악에 저를 갈아 넣었고, 그 결과 또한 성공적이었습니다. 이번엔 수정사항이 여러 개 있었지만, 잘 수정하여 컨펌을 받아냈고, 끝내 다른 곡들의 튠 작업도 모두 맡게 되었습니다.

진짜 아티스트

이어서 5번 트랙 ‘작전명 청-춘!’의 튠 작업 또한 잘 마무리하여 컨펌을 받아냈고, 4번 트랙 ‘늙은 개’ 라는 곡을 작업하게 되었습니다. 튠 작업을 마무리하고 컨펌을 받기위해 작업본을 전달했는데, 잔나비 측에서 원본의 날 것과 같은 느낌을 살리고 싶다 하여 제가 작업한 것을 아예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쉽기보다 잔나비가 아티스트로서 음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존경심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발매 당시 임느님 위에…

이로서 잔나비 ‘소곡집 1’ 앨범에서 4번 트랙 ‘늙은 개’를 제외한 모든 곡에 관여를 하였고, 2020년 11월 6일 앨범이 발매되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음향 엔지니어로 지낸 모든 시간 중 밤새가며 ‘가을밤에 든 생각’ 곡을 작업했던 시간들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많이 힘들기도 했고 보람차기도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하루하루 정말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지금은 추억이 된 잔나비의 소곡집 앨범.. 가끔 그 곡들이 들릴 때, 열정에 밤을 새웠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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